선교사의
고민들이란 과연 무엇일까?
고민과
문제가 없는 사람이야 없겠고,
또한 선교사의 사역과 지역마다 처하게되는 고민과 문제들이 각양각색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선교사의 고민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되어지지 않을까 싶다.
선교지에
처음 부임하는 신참 선교사는 일단 자신의 선교비전을 선교지의 실상에 맞추어가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된다. 필자는 16년간의 케냐 생활속에서,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언어와 문화충격 등으로 힘들어 하는 선교사님들을 돌아보고 위로할 기회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100명의 선교 헌신자 중 오직 1명만이 실제 선교사로 나온다고 하는 통계를 본적이
있다. 이토록 귀한 소명과 선택을 받고 선교지에 나와서도 실전에서는 이겨내야하는 수많은 도전과 난관들로 인해
신참 선교사들은 뜻대로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을 수차례 보았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보낸 선교사를 위해 후방의 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감당해야하는 일은 재정후원과 방문에 앞서 이들을 위해 충심으로 중보하는 일이다.
선교지의 낙담스러운 환경속에서 전력질주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길을 여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더하시도록 간구하는 일이다.
선교사를 위해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구하는 그 누군가의 기도가 선교지에서 반드시 역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당신의 종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심령을 가지고 기도하는 선교중보는 전방 선교사와 동역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편이
된다.
선교사는
무슨 일 하나 처리할때마다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정부 관리들과 씨름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선교지의 생활과
사역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만약 선교사가 미혼으로 선교지를 나간다면 결혼 문제가 대두될수도 있다.
기혼이라면 가족 관리와 자녀 문제가 이슈로 제기될 것이다. 선교지에 나가 선교를
하더라도 선교사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해야한다. 나아가,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겪게되는 가장 부담스러운 일 두가지는 상주 비자(work permit)를
받는 일과 다른 선교사들과의 인간관계이다. 후방에서는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는지 모르나, 이 두가지 도전적인 이슈는 많은 전방의 선교사들에게 피부로 다가온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신참
선교사들은 주변의 인간관계에서 균형을 잃고 상처를 받게된다.
이
시점에서 선교사가 필히 넘어야하는 신앙의 언덕은 바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현지인을 용서하고 동역자를 용서하고 다른
선교사들을 용서해야 한다. 필자도 선교지에서 비교적 짧지않은 시간을 섬기며 보니, 시간이 지나면 풀릴것은 풀리고 알려질 것은 알려지고 고쳐질 것은 고쳐지는 것을 보았다. 내
파트는 그저 용서하면 되는 것이었다. 용서할때에 개인의 성숙과 사역의 성장이 초래되어지는 것을 느꼈다.
“용서한다”의 영어 단어인 forgive는
for(무언가를 위하여)와 give(준다)라는 두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어휘이다. 풀어본다면, 나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 나의 권리, 감정, 상처를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는 행위를 의미한다. 내 속에서 불끓듯하는 보복심리를 내가 받아야할 축복을 위하여 자원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던져버리는 일을 가르킨다. 상처는 결코 무시하거나 즐기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한다.
상처는 딛고 극복해야만 한다. 내가 지금 처한 역경에 대해 불평만 하지말고 선교사는
그 역경을 딛고 올라설수 있어야 한다.
처음 4-5년의 견습 기간이 지나면
선교사는 또다른 도전에 봉착하게된다. 바로 안식년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필자도 16년간 아프리카 선교지에 있으면서 안식년을 한번도 정식으로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한국인 선교사들에게 부담스러운 이슈로 다가오는지를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4-5년이
흘러가고 소위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10년이라는 세월을 선교지에서 보내면서 선교사는 본인의 가정과 사역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는 것을 보게된다. 여기서 조심해야하는 것은 나의 야심과 하나님의 비전을 착각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개척되는 교회수에 연연하고 가시적이고 단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을 고백할수 있다.
일에
중독되어서 workaholic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인간관계나 가정보다도 일이 더 중요하게 되어 인생의 본질적인 축복을
놓치게 되는 실수도 범하고는 하였다. 그러다보면 꼭 찾아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도와주었고, 이를 통해 나를
더욱 성숙한 선교사로 빚어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로 4-5년이 또 지나고나면 선교사는 성장과 확장의 기간을 맞이한다.
선교사역은 점차 확장되고 일은 매우 익숙해진다. 이때에 다가오는 또하나의 위험이
있다. 바로 비전의 관례화(routinization)이다.
선교사는 그가 이끄는 사역에서 더이상 이전같이 신선한 공기를 느낄수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엘리야에게 희석된 비전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관례화되어가는 당신의 종들에게 두가지의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신다 (열왕기상 19:9-18). 첫번째 음성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What are you doing here?)”라는 질문이고,
두번째 음성은 “너는 네길을 돌이켜 (Go back the way
you came!)”라는 명령이다. 우리가 지치고 상해 있을수록 더욱 비전으로 돌아가
그 비전을 품고 살라는 교훈이 여기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선교사 스스로가
개인의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도전이나 공부가 도움이 될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어느덧 고참이 되어버린 선교사에게 역동적인 에너지를 재생산하고 비전의 재도약을 경험하게 해준다.
끝으로
선교사의 고민에 대해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아마도 건강 문제를 간과할수가 없을것이다. 선교사 본인이 건강할때에 그의 가정도
그의 사역도 그의 선교지도 건강해짐을 잊지말아야 한다. 고로, 어디에서
사역하든 간단하게라도 정기적인 운동을 하는 것은 장기적인 면에서 도움이 될수있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와 선택을 따라 선교지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는 단계별로 여러가지 문제들을 만나게된다. 타국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만도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혼을 구하는 선교사역이라고 해서 선교사 개인의 시간표를 선뜻 따라가주지는 않는 것을 보게된다.
이 역시 선교사를 지치고 낙담하게 만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문제는 선교사가 너무
일찍 포기하는데에 있다. 한 영혼을 붙잡고 10년,
20년이 지나서야 변화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문제는 선교사가 그전에
지치고 포기함으로 인해 10년, 20년을 기다려 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본국의 목회사역이 마라톤이라면, 해외 선교사역 역시 마라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마태복음 28:19-20의 제자를 삼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특히 문화와 성정이 다른 선교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사실 크기로 따지면 대한민국 땅보다도 작은 유대땅 내에서 겨우 12명을 데리고
자신의 공생애 거의 대부분을 투자하셨다. 나아가 “현지인”들인 유대인들을 믿어주며 양육하심으로,
자신이 떠난 후에도 스스로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ing),
자전(self-evangelism)하는 지역교회가 탄생할수 있도록 성령님을 통해
끊임없이 뒤에서 힘을 북돋우어 주셨다. 양(quantity)도 중요하겠지만,
이렇듯 질(quality)을 우선으로 하는 선교는 반드시 하나님앞에 인정받는 진솔된
열매로 드러나 열방을 변화시키게 될것이다.